가장 밑바닥부터 차오른다. 예를 들자면 발바닥이다. 빈 병에 물이 차듯 제일 도톰하게 튀어나온 부분부터 발등, 발목을 거쳐 상향한다. 종아리 다음은 무릎이고 허벅지, 골반을 거쳐 배꼽을 지나 허리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숨조차 쉬기 버거워진다. 그럼에도 멈출 방도는 찾지 못하기에 말로 다 못할 극심함에도 방관할 따름이다. 명치를 지날 땐 짜릿하고 가슴께에 다다르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심장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심장이 잠식되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미치는 걸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흐름은 멎지 않고 목보다 위로 올라간다. 입을 거칠 땐 신음을, 코를 지날 땐 고된 숨결을 뱉어보지만 완화하기엔 택도 없다. 이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윽고 정수리까지 차올랐을 때 깨닫고 만다. 아무리 몸부림 쳐 봤자 검게 고인 물속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절여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과거에 갇혀 오도가도 못한 채, 언젠가 균열이 생겨 전신을 채운 고통의 수액이 빠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지요. 그렇게 겪고도 반복하니까."
남자는 웃었다. 비틀렸으나 잘생긴 얼굴에는 오히려 매력을 더하는 미소였다. 퍽 만족스러운 듯,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콧노래를 부른다. 흥얼거리는 곡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중후하면서도 깨끗한 미성은 귀를 파고드는 순간 가시로 뒤덮인 덩굴로 변모했다. 뱀처럼 꿈틀거리며 뇌피질을 후벼 파는 감각은 끔찍했으나 비명을 내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째서 당신은."
턱을 잡혔다. 흡사 흉측한 몰골을 지닌 희귀 동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대로 천천히, 아주 조금 힘을 주어 좌우로 돌려보며 관찰하는 적과 청의 금은요동에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으나 그뿐, 호감은 일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번 나를 좋아하게 되는 걸까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찰랑찰랑, 가득찬 내수에 똑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파동의 시작은 잔잔할지언정 퍼지면 퍼질 수록 진도를 더해, 마비된 줄만 알았던 전신에 다시금 감각을 일으킨다. 일깨워주는 것이다. 눈앞의 남자, 로쿠도 무쿠로가 자신을 보아줄 일은 영영 없다는 사실을.
"어째서입니까, 사와다 츠나요시."
달라. 외치고 싶었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러나 비록 눈동자가 비추는 건 내 모습일지언정 남자가 보고자 하는 건 신체를 아득히 넘은 본질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다. 그는 나를 통해 내 전생을 보면서도 나를 보는 것은 거부한다.
기억할 리 없는 전생의 내가 발목을 붙잡고 놔 주지 않는다. 균열이 생기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무척이나 절망적이었다.
2015.11.26
90일 달성표 중 0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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